충남대학교는 6·25전쟁 중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 피난 온 민태식 교수와 한학자 김순동 등이 전시연합대학을 계획하면서 설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1951년 5월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같은 해 9월 민태식 교수를 학장으로 문리과・법과・경상과 등 3개 학과의 전시연합대학이 발족됐으며, 이는 충남대학교 설립의 모태가 됐다.
1951년 11월부터 충남지역의 유지들은 충남의 인재 양성을 위하여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1월 23일 충청남도의 시장・군수・경찰서장 회의에서 충남대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다음 해 1월까지 10억 원을 모으기로 하였다. 이때 기성회의 모금 운동은 범 도민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시・군별로 주민들에게 학교 설립 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기부를 호소하였다. 이에 도민들은 돈이 없으면 쌀을 내는 등 일두일미(一豆一米)정신으로 대학 설립에 힘을 보탰다.
이처럼 충청도민들의 희망과 염원이 담긴 충남대학교는 1952년 5월 25일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충남대가 탄생한 위대한 순간이었다. 이날 진헌식 충청남도지사가 총장서리에, 전시연합대학 학장이던 민태식 교수가 초대학장 서리로 취임하였다.
개교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충남대학교는 전시 체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을 모집하였으며 비록 교사(校舍)와 교수진이 부족한 형편에서도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충남대학교는 문리과대학의 문학과・이학과・법학과 등 3개 학과(정원 220명)의 제1회 신입생을 모집하여 1952년 6월 7일 대전시 공관에서 역사적인 개강식을 개최하였다.
충남대의 제1대 총장은 1955년 조교수 이상으로 구성된 전교 교수회에서 선출된 민태식 총장 서리였다. 같은 해 8월 29일 자로 민태식 교수가 제1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동안 지사겸직 총장서리가 개교 이래 대학 행정을 맡아 오다가 비로소 민태식 교수가 전임 총장으로 발령을 받았기에 더욱 뜻깊은 순간이었다. 민태식 총장은 1954년 12월부터 1960년에 이르는 만 5년이 넘는 총장 재임 시기에 교지 확장・교사 증축・ 대학원인가・도서관 신설・실험실 확장・실습 공장 신설・교원 충원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창립 초기에는 학교 부지와 교사(校舍)의 확보 문제가 충남대학교의 최대 과제였다. 이 시기에 충남대학교는 충청남도에서 제공한 대사동과 문화동 일대의 국유지와 도비로 매입한 토지 총 349,314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교사는 인근의 공공건물을 대여받아 강의를 시작하였다. 문리과대학은 1952년 6월 개강 시에는 전시연합대학에서 사용하던 대흥초등학교의 교실과 법원의 일부 건물을 대여받았으며, 그해 7월에는 충남도청 서남쪽에 위치한 목조 창고를 교실로 개수하여 강의하였다. 1954년 12월 비로소 대사동 부지에 제2본관와옥 321평을 준공하고 1955년 4월에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화학과 물리학 실험실을 비롯하여 특수과학관이 설치되었다. 1959년 12월 말에는 총 1,626평의 교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1960년대 대학교육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 한국 사회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960년의 4·19혁명과 그다음 해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정변이 대학 사회를 덮쳤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래 이승만 정권은 광복을 계기로 축적된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키는 데 실패했고, 3·15 부정선거를 통해 태동하던 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이에 충남대 학생들은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자 1960년 4월 19일에 총궐기해 학원 민주화를 위해 정부의 임명 제도에 의하여 취임한 현직 총학장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후 이에 대한 찬반양론이 거세게 논의되는 됐으며, 그 결과 문리과대학 김순동 학장과 민태식 총장이 물러났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은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사회의 교권과 학생자치의 문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5·16 군사정부는 학원의 질서 확립을 특히 강조하였다. 5월 19일 제9회 개교기념일을 전후하여 ROTC 1기생의 입단식이 있었으며, 6월 12일에는 교모가 제정되었다.
1964년 군사정부의 한일협정 체결 강행에 따라 충남대학교에서는 3월 26일 2교시가 끝난 후 ‘평화선을 사수하자’, ‘굴욕외교를 반대한다’ 등의 포스터를 들고 문리과대학과 농과대학, 공과대학 학생 7백여 명의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6월 3일 전국적인 시위가 폭발하였는데, 충남대학교에서는 2일부터 궐기대회가 일어났다. 농과대학 학생 4백여 명은 교정에서 정부 성토대회를 열고 ‘무력한 황소, 농민은 통곡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였다. 학생의 시위가 날로 확대되자 급기야 6월 5일 임시휴교령이 내려졌으며, 7월 5일부터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이듬해인 1965년 8월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학의 휴교령이 되풀이되었다.
학생운동으로 인한 학원의 혼란 속에서도 발전을 향한 충남대학교의 발자취는 꾸준히 계속되어 5월 25일의 개교 13주년을 계기로 제1회 보운제가 개최되었다. 2월 새학기부터 교양학부가 신설되었으며,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신설하여 학문연구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였다. 창의·탐구·개발의 3대 교시를 정하고 교육방침을 제정하는 등 대학의 이념을 확정하여 대학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구체적인 교육방침으로 ‘인격도야·연구투철·생산교육’을 정하였다. 대학의 지성과 정념의 상징인 교가도 제정되었다.
이처럼 1952년부터 1967년까지는 충남대학교가 지역거점국립대학교로 정착하는 시기였다. 시대적으로는 전쟁과 가난, 그리고 독재의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대전·충청 지역의 고등교육의 입지를 다지고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특히 충남대학교 구성원들과 지역민들은 일두일미(一豆一米)의 정신으로 충남대학교의 설립에 한마음으로 협력하였다. 오늘날 충남대학교가 지역거점국립대학의 중심이자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노력이 기초가 된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