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새해, 나에게 바란다

‘전쟁중이라도 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우리 손으로 우리 대학을 만들자’며 가마니 한장, 쌀 한 되를 모아준 200만 충청도민의 ‘일두일미(一斗一米)’ 정신으로 설립된 충남대. 산업화를 위한 인재 양성의 요람이자, 충청권 민주화 운동의 성지까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던 역동의 대한민국 현대사 한 페이지를 수놓았다. 이처럼 충남대학교는 지난 70년의 역사 동안 대전·세종·충남지역을 대표하는 국가 거점국립대학교로서 지역 균형발전과 대한민국 발전을 견인해 왔다. 70년이라는 세월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충남대 개교 70주년의 주요 에피소드를 돌아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충남도민의 굳은 의지

충남대학교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25일 도립대학으로 창립됐다. 충남도에서 제공한 대사동과 문화동 일대의 국유지와 도비로 매입한 토지 총 349,314평을 통해 캠퍼스부지를할수있었다. 이후 문교부의 공식적으로 설립 인가가 이루어지자 진헌식 충청남도 지사가 총장서리에, 전시연합대학 학장이던 민태식 교수가 초대학장 서리로 취임하였다. 충남대학은 도립대학으로 발족한 만큼 다른 시·도의 국립 종합대학교와 같이 전임 총장을 임명하지 않고, 설립자인 충청남도 도지사가 겸임했다.

충남대는 전시체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을 모집하고, 강의동과 교수진이 부족한 형편 에서도 대학이라는 기틀을 닦아갔다. 개교 당시에는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공과대학의 3개 단과대학에 7개 학과의 총 1,800명의 학생 정원을 인가받았다. 하지만 공과대학은 정부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개교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농과대학은 개교에 필요한 준비가 완성될 때까지 입학생 모집이 보류됐다. 결국 문리과대학의 문학과, 이학과, 법학과 등 3개 학과(정원 220명)만 제1회 신입생을 모집했으며, 1952년 6월 7일 대전시공관에서 역사적인 개강식이 개최됐다.

개교 당시 충남대는 충청남도 당국의 행정 지원과 국유 재산의 부지 제공이 있었으나, 기성회를 주축으로 한 각계 유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특히 3백만 도민의 정성스러운 모금운동 등이 하나가 되어 도립 충남대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특정한 종파나 재단의 주도 하에 설립되지 않고, 충남도민 전체의 정성과 힘에 의해 개교되었음은 대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쉽지 않다. 충남대의 설립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지역 인재를 양성하고자 전 충남 도민이 모금한 기금으로 이룩한 금자탑이며, 대학을 설립하여 자유로운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는 전도민의 의지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한 고된 시련과 힘찬 투쟁

1960년 4월 19일, 대학 교육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충남대 구성원들은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자 4.19혁명에 총궐기했다. 학생들은 대학의 민주화를 요구했으며, 정부의 임명 제도에 의하여 취임한 현직 총장과 학장들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잇따른 5.16군사혁명으로 대학의 민주화는 위기를 맞이했다. 1969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으로 인해 모든 대학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대학의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대학 질서 확립을 위한다며 위수령을 공포했다. 충남대 구성원을 비롯한 대학생들의 열띤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자율성은 더욱 위축되고 말았다.

정부는 1973년 문교부 차관을 역임한 서울대 박희범 교수를 충남대 총장으로 파견했다. 박 총장은 학생의 민주화 운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학생 시위를 주도한 오원진 학생을 비롯해 총 6명을 제적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11월 29일부터 도서관을 점거하고, 박 총장의 사퇴를 최후 통첩하였다. 학교 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학생들은 도서관 출입문을 차단하고 1주일에 걸쳐 단식투쟁을 전개하며 총장 퇴진과 제적 학생의 구제 요구등 학교 측의 강경한 대처에 굴하지 않고 맞섰다.

10·26사태에 이어 12·12사태가 일어나는 등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흔드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잇따랐다. 1980년 5월 1일,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충남대학교 사상 최대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대운동장에 모인 5천여 명의 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언론자유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대전역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학생 시위대는 출동한 경찰대의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섰다. 5월 1일부터 17일까지 충남대 학생들은 철야농성, 가두행진 등 민주화를 위한 힘찬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5월17일 자정을 기해 확대된 전국 비상계엄으로 인해 충남대에는 무장 군인들이 진주했다. 결국 충남대는 완전히 폐쇄됐고,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암울한 시대적 역기류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충남대 발전의 기류는 이어지고 있었다.

대덕캠퍼스를 통해 새시대를 열다

충남대학교는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도 문화동 캠퍼스에서 현재 유성구 소재 대덕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캠퍼스 이전 사업은 대학의 시대적 사명과 지방국립대학의 육성이라는 국가 시책에 따라 계획·추진됐다. 대덕캠퍼스 이전을 본격화한 주인공인 서명원 총장은 제9대 총장을 연임하면서 이전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81년에는 대학 본부와 법경대학을 시작으로 이듬해에 농과대학이 마지막으로 이전을 마쳤으며, 충남대의 상징이자 중추 시설인 중앙도서관이 신축 개관됐다. 당시 초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중앙도서관은 충남대의 랜드마크로서 캠퍼스 중앙에 위치해 누구나 접근이 용이해야 한다는 서명원 총장의 뜻에 따라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됐다. 이전이 완료된 이후에도 체육관·기숙사·실험실습실·공장동 등과 같은 부속 시설이 계속 신축 개관되어 대학의 시설 및 기능이 대폭 확장됐다.

이로써 대학의 규모는 1985년 당시 40만 평의 대지 위에 4만 5천여 평 규모의 강의실·교수연구실·공장동·실험실습실·중앙도서관 등을 마련해 전국 어느 대학 캠퍼스보다 훌륭한 시설과 환경을 갖추게 됐다. 또, 전자계산소·어학연구소·공업교육연구소, 화학분광학연구소 등 다양한 연구소가 설치되며 연구 대학으로서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대덕캠퍼스의 성립과 함께 때를 맞춰 학생정원이 대폭 증가했으며, 그에 따른 교수 정원도 대대적으로 증가하여 명실공히 명문대학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역을 넘어 세계로의 도약

대덕캠퍼스 이전 이후 충남대는 변화와 혁신을 기회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나갔다. 1989년부터는 총장 직선제 선거가 시행돼 제11대 오덕균 총장이 선출되었으며, 정덕기 윤형원 이광진 양현수 송용호 총장에 이어 2012년 제17대 정상철 총장까지 교수 직접 선거에 의한 총장 선출이 이뤄졌다. 이 시기에 사회과학대학 수의과대학 예술대학 법경대학 약학대학 생활과학대학 간호대학 그리고 생명시스템과학대학 등이 신설되었고, 고시관 및 교시탑 박물관 임해수련원 등의 시설이 속속 준공됐다.

또, 1990년에는 ‘김밥 할머니’로 세상에 잘 알려진 故 이복순 여사가 김밥 판매와 여관을 경영하면서 평생 근검절약해 모은 현금 1억원과 부동산 등 50억 원 상당을 충남대에 기부했다. 이복순 여사의 숭고한 뜻은 국제문화회관 설립의 계기가 됐다. 1995년 충남대는 이복순 여사가 기탁한 부동산을 매각하고 70억여 원의 예산을 자체에서 부담할 것을 전제로 대규모의 국제문화회관 건립을 계획해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 결과 이복순 여사의 법명을 딴 '정심화(正心華) 국제문화회관'이 정식 개관하며, 현재 충남대를 대표하는 건물이 됐다.

개교 70주년의 역사를 가진 충남대는 대학 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1994년 중부권 국책대학으로 선정됐으며, 같은 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서 실시한 대학종합평가에서는 전국 3위를 차지했다. 1996년에는 교육개혁평가에서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지방대 특성화사업에서도 ‘우수’ 평가를 받았다. 2000년도에는 제4회 산학연 컨소시엄 평가 결과 전국 1위를 차지하였으며, 2011년 중국 상하이 교통대학에서 발표한 세계 500대 대학 중에 우리 학교가 400위권에 포함됐다. 최근 충남대는 ‘2021년 한경 이공계 대학평가’에서 거점국립대 1위를, 2022 QS 세계대학평가에서 ‘농임업학’, ‘약리학’ 분야 거점국립대 1위를 달성하는 등 ‘창의 개발 봉사’의 이념으로 세계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도약하고 있다.